일본의 야만적인 행동! 경천사 석탑 무단 해체와 약탈 사건


경천사 10층석탑

- "고려시대의 보물, 경천사 10층 석탑의 비극"

- "일본의 약탈, 경천사 석탑의 고통적 운명"

- "미국과 영국의 영웅들, 문화재 약탈을 막다"

- "복원의 기적, 경천사 석탑의 귀환"


1907년 3월 7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된 기사는 충격과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기사 내용은 1907년 조선을 방문했던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 마스야키가 경천사 10층 석탑을 무단으로 해체하고 일본으로 반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논란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조선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대변하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경천사 10층 석탑은 고려시대인 1348년에 건립된 석탑으로, 경천사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연리 부소산에 위치한 사찰로, 고려 왕실의 기일에 종종 추모제를 지내던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건축 기술과 예술을 대표하는 보물로, 그 가치는 상당히 높았습니다. 이 석탑은 건립 연대, 발원자, 그리고 조성 배경을 알 수 있도록 명문이 탑신석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1902년, 일본의 미술사학자인 세키노 다다시가 이 석탑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 전역의 문화재를 조사하던 중 경천사를 방문하고 이곳의 석탑에 관한 학술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의 연구 결과가 1904년에 발표된 후, 이 석탑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사건의 전개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907년, 다나카 마스야키는 경천사 지역으로 이동하고 약 120명의 일본인들과 함께 석탑 주변에 천막을 치고 숙박하며 석탑을 해체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근 주민들과 군수 일행이 이를 막으려 했지만 다나카 마스야키는 고종 황제가 허락했다는 거짓말을 내세우며 주민들을 위협했습니다. 그 결과, 단 하루 사이에 석탑은 전부 해체되었고 일본으로 반출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 미국, 프랑스 등 국제적으로 다양한 언론에서 다뤄졌으며, 이에 분노한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와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노력으로 사건이 더욱 큰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것은 영국인 베델의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였으며, 그의 보도가 사건을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했습니다.


미국을 방문 중이던 일본군 제1군 사령관 구로키 다메모토는 미국 신문 기자들이 사건을 조사하려고 했을 때, 아예 신문 기자들의 접근을 차단한 일로도 기억됩니다. 그러나 미국의 선교사 호머 헐버트와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의 노력 덕분에 사건은 국제적인 이슈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사건 이후, 일본의 이륙신문에는 미국에서도 사건이 큰 화제가 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으며, 구로키 다메모토가 신문 기자들의 접근을 막은 사실도 보도되었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일부 인물들이 다나카 마스야키의 행동을 비판하며 사건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경천사 석탑은 40년간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기술로는 해체된 석탑을 다시 조립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1959년, 국립박물관이 주최한 보존처리 작업을 통해 석탑이 복원되고,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경천사 석탑의 복원 작업은 어려움과 시간이 걸렸으며, 마침내 2005년에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 가능해졌습니다. 이렇게 우리 문화유산 중 하나인 경천사 10층 석탑은 우리의 국가 정체성과 역사를 대표하는 중요한 기념물로 복원되어 현재까지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문화유산의 중요성과 보존의 어려움을 강조하며, 해외로 불법으로 반출되는 문화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우리 문화재가 해외에서 불법으로 보존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 사건은 더욱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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